울리히 쾰러의 회상
박규재 옮김
번역 및 게재를 허락해 주신 울리히 쾰러에게 감사드립니다. 행사에 보내주신 관심과 응원에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We would like to express our sincere gratitude to Ulrich Köhler for granting us permission to translate and publish his text. We also deeply appreciate his support and interest in this event.
영화감독이 현장에 있다. 나는 그를 좋아하지만, 이 영화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나는 자리에 앉아 있어야 하지만 점점 더 짜증이 난다. 나중에 우리는 이야기를 나눈다. 나는 거짓말을 할 수도, 침묵할 수도 있다. 상처 주지 않으면서도 솔직하게 말하려 애쓴다. 참담하다. 잘못된 배려는 모두를 난처하게 만든다.
나는 더 잘 알았어야 했다. 내 영화 〈방갈로〉는 슈베린 영화제에서 최고상을 받았다. 나에게 '하늘을 나는 황소' 상과 재정적 구원을 안겨준 심사위원단은 시상식이 시작되기 전 슬그머니 사라졌다. 다른 모든 사람들은 그 영화를 싫어했고, 그것을 숨기지 않았다. 영화를 보며 고통받는 90분 동안 긍정적인 부분을 억지로 끌어내려고 애쓰는 사람 따윈 없었다. 솔직한 혐오와 즐거움이 있는 밤이었다.
함부르크 메트로폴리스에서 열린 뤼디거 노이만 회고전은 나를 조금 두렵게 했다. 나는 그의 영화를 한 편도 보지 않은 채, 그의 밑에서 3년 동안 공부했다. 뤼디거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 늘 수줍어했다. 그가 자신의 작업을 이야기할 때면, 마치 몇 년 전 자신이 만든 영화가 아니라 뤼미에르 형제의 영화에 대해 말하는 듯했다.
아마 그는 더 이상 예술가로 인식되고 싶어 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그 무렵 그는 음향 스튜디오의 대표이자 대학 강사였다. 그의 세미나에는 극소수만이 들어갈 수 있었고, 그들 또한 언제든 그의 눈 밖에 날 수 있었다. 그의 기준은 결코 객관적이라고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노이만의 수업은 일종의 워크숍이었고, 나를 지금까지도 형성해온 논쟁의 장소였다.
예술과 영화 아카데미를 직업학교로 바꾸려는 시도는 터무니없다. 뤼디거는 그런 식의 훈련가가 아니었고, 되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그는 내러티브 영화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다고 솔직하게 인정했다. 그럼에도 그의 제자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지금은 장편영화든, 예술이든, 광고든, 주류에서든 언더그라운드에서든 그 중간 어디에서든 다양한 위치에서 활동하고 있다.
올리퍼 히르슈비겔, 헤르미네 훈트게부르트, 파티 아킨, 안드레아스 도라우, 프리더 슐라이히, 이레네 폰 알베르티, 로트라우트 파페, 헤너 빙클러, 헨리케 괴츠, 파트리크 오르트, 잔 파우스트, 니나 쾨네만, 요헨 덴, 다니엘 마이어-라이머(...)는 모두 한 번쯤 투덜거리는 뤼디거 앞에 앉아 자신들의 프로젝트를 설득하려 애썼다.
첫 만남부터 나는 그의 겁주기 방식과 마주하게 되었다. 내 슈퍼 8 실험영화 〈펠트슈트라세〉는 그의 눈에는 완전한 실패작이었다. 개념적으로 일관성 없고, 형식적으로는 논의할 여지도 없다는 것이었다. 짧고 정확한 그의 평은 우리의 관계를 끝낼 수도 있었지만, 세미나에서 이어진 논쟁은 끝도 없이 길어졌고, 두 시간 후 뤼디거는 내가 그 3분짜리 영화로 그를 얼마나 괴롭혔는지 잊어버리고 말았다. 나는 그의 수업에 받아들여졌다.
영화감독으로서의 노이만은 〈돌/빛〉으로 나를 매우 행복하게 했다. 과장 없는 자연의 아름다움이었다. 황량한 작은 마을들이 극지방 하늘의 믿기 어려운 빛의 장관을 무심하게 바라본다. 뤼디거는 카메라를 절대 패닝하지 않고, 쇼트들을 거칠게 이어붙인다. 그의 파노라마는 각각의 독립된 쇼트들이 이어져 구성된다. 그 쇼트들은 짧게 지속되며, 제임스 베닝의 영화와는 전혀 다르다.
두 사람이 서로 알고 지냈는지 궁금하다. 그들의 영화 언어는 이보다 더 상반될 수 없을 정도로 다르지만, 비슷한 영역을 파고들어 왔다. 두 사람 모두 자연을 바라보는 데 무구한 시선 같은 것은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다. 그들은 거의 고전적인 의미에서 아름다움을 찾지만, 거기서 어떤 형이상학적 약속을 이끌어내지는 않는다.
〈시선의 아카이브〉는 80년대 서독의 초상이다. 그 시절 서독에는 중심이 없었고, 제각각의 지방들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북부는 빨간 벽돌, 중부는 콘크리트와 슬레이트, 석면 시멘트판, 남부는 목재와 제라늄이 집의 외관을 규정했다. 폭스바겐 시로코는 그것이 달리는 숲만큼이나 잘 손질돼 있었다. 1983년, 헬무트 콜 정부의 첫 전환이 일어나던 해의 독일이었다.
나는 뤼디거의 초기 ‘지형적’ 영화들을 본 적이 없다. 그것은 구조영화적 작업으로, 작가를 수학적 우연의 원칙으로 대체하려는 시도였다. 그가 그 시도에서 실패했기를, 적어도 그의 친구 클라우스 비보르니처럼 실패했기를 바란다. 비보르니는 자연과학적 방법으로 작가를 굴복시키려 애써왔지만, 그 과정에서 지난 30년 중 가장 아름다운 작가영화들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형용사 몇 개로는 설명될 수 없는 면들이 있었지만, 뤼디거 노이만은 ‘계몽된 낭만주의자’였다. 그는 2007년 6월 23일, 향년 63세로 세상을 떠났다. 나는 그의 영화를 다시 볼 수 있기를 바란다. 함부르크에도 ‘새로운 독일 영화’가 있었다. 그는 아트하우스엔 지나치게 급진적이고, 미술관엔 너무 영화적이었다. 그의 영화는 영화관에 있어야 한다. 지금도.
- 울리히 쾰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