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환 옮김
1 뉴 저먼 시네마와의 만남 1966
2 페터 네슬러, 타협하지 않는 다큐멘터리스트 1966
3 페터 네슬러 소개 1968-1972
4 다니엘 위예가 페터 네슬러에게 보낸 편지 1969
5 다니엘 위예와 장-마리 스트로브가 페터 네슬러에게 보낸 편지 1984
본 지면에서 페터 네스틀러(Peter Nestler)는 합의된 표기에 따라 페터 네슬러로 옮겼다.
새로운 영화의 특징이 (상류) 사회 그리고 그것의 반대 진영으로 자기규정 하는 영화 산업 양자 모두에 의해 방해받는 것이라면, 우리의 영화는 적확하게 뉴 저먼 시네마를 대표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한때 혁신적이었으나 이제는 길들여진 (그리고 단순한 아이디어와 미학적, 도덕적 클리셰만을 담아내는) ‘누벨바그’와 대조적이다. 망가진 독일 영화 산업과 그 산업에 의존적인 언론들은 한동안 누벨바그를 찬양해 왔으며, 수단을 총동원해 대중에게 강요하고 있다. 〈화해불가〉(1965), 〈우주의 제로〉(1966), 〈로마에서의 아침 식사〉(1965), 그리고 ― 〈수문에서〉(1962)를 제외한 ― 페터 네슬러의 모든 영화는 배급사를 갖고 있지 않다. 〈수문에서〉, 〈마쇼르카-머프〉(1963), 〈댐〉(1964), 〈화해〉(1965)는 그들의 배급사에 의해 보이콧 당해왔다…. 〈마쇼르카-머프〉, 〈댐〉, 〈화해〉, 〈로마에서의 아침 식사〉는 18세 미만 관람 불가 판정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휴일과 국경일에는 상영이 금지되었다. 이 영화들은 특별 수상의 기회는 물론 최소한의 세금 감면 혜택으로부터 배제되었다. 이들 중 그 어떠한 영화도 ― 심지어 〈작은 전선〉(1965)도― 베를린, 오버하우젠, 혹은 만하임 영화제 경쟁 부문에 선정된 적이 일절 없었다.
모두 스타일과 작법을 갖추는 것에 만족하고 모든 유형의 유행하는 포르노그래피 (풍자, 패러디, 엔트로피)를 거부한다: 예술은 브레송이 말하는 “경이로운 시네마토그래프”에만 경의를 표하며, 그것의 위대함은 프루스트의 말처럼 “[참된 예술의 위대함이란] 우리가 멀리 떨어져 사는 그 실재, 곧 우리가 대용하고 있는 판에 박은 지식이 농도와 불침투성을 한층 더해 감에 따라서, 우리가 더욱더 멀어져 가는 그 실재를 재발견, 재파악하여 우리에게 인식시키는 데” 있다. 따라서 이 영화 중 어떠한 작품도 무엇인가를 표현하려는 의도는 갖지 않으며 (“나는 잘 알고 있다”라고 스트라빈스키는 말한다, “음악은 어떠한 것도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그 작가들은 대중만큼이나 개별적인 진실을 믿는다. 왜냐하면 브레히트가 말하듯, “자명한 것의 잔해 밑에서 진실을 파헤쳐내고, 개별적인 것을 일반적인 것과 두드러지게 연결시키며, 큰 과정 속에서 특수한 것을 고수하는 것, 이것이 리얼리스트들의 예술이다.” 그리고 아라공이 말하듯, “다수로부터 정의가 태어나고, 진실이 솟아오르며, 이 안에서 미래가 형성된다. 이 정의, 이 진실, 이 미래가 예술에 속하는지, 인간에게 속하는지는 말할 수 없다. 그것들은 분리할 수 없는 총체를 이루기 때문이다…”
J-M.S.
아드리아노 아프라에 따르면, 이 글은 1966년 5월 28일부터 6월 5일까지 열린 제 2회 페사로 국제 뉴 시네마 영화제(Mostra internazionale del Nuovo Cinema di Pesaro, 페사로 국제영화제)의 카탈로그에 최초로 수록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해당 영화제에서는 아드리아노 아프라가 기획한 뉴 저먼 시네마 섹션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해 〈마쇼르카-머프〉는 페사로 영화제에서 두 개의 수상 실적을 기록했다.
2 페터 네슬러, 타협하지 않는 다큐멘터리 감독 1966
페터 네슬러는 지금까지 일곱 편의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일부는 텔레비전 방송을 위한 것이고 일부는 자체적으로 제작한 것이다. 사람들은 이제 서서히 그의 작품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왜 ‘서서히’일까, 그의 영화는 피상적인 매력으로 관객을 끌어들이지 않는다. 그들은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 그들을 살펴볼 것을 요구하는데, 이것은 영화계에서 흔치 않은 관행이다.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일에는 제약이 있다. 예술가로서의 ‘자아’를 매력적으로 드러낼 기회도, 작가로서의 인장을 세계에 새겨둘 기회도, 그리고 다양한 스타일을 발전시킬 기회도 없다. 중요한 것은 오로지 카메라 앞에 놓인 대상에 대한 겸손한 태도뿐이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만 감독의 개성이 드러난다.
페터 네슬러는 선험적인 주제의식 없이 자신의 영화에 다가간다. 현실은 의도에 따라서 조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완벽하게 자명한 것이어야 하지만 불행히도 그렇지 않다. 그의 영화들이 무엇인지 더 쉽게 설명하는 일은 그가 무엇을 포기하는지 헤아리는 것에서부터 출발할 수 있다. 왜일까? 명백하게도, 세상에서 가장 간단한 일은 동시에 가장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저 집들을 향해, 길 위로, 그리고 사람들을 향해 카메라를 겨눌 뿐이다. 그러고는 개개인이 말하게끔 하고, 논평 없이 선택들을 이어낸다. 이것이 흩어진 조각들이 모여 산업화된 도시, 변해가는 풍경, 노동자 운동을 드러내는 방법이다. 이러한 일관된 방식을 거쳐, 우리의 눈 앞에, 세계는 새로이 형성된다. 우리는 세계를 새로운 일관성 하에 보게 된다.
페터 네슬러는 참여하지 않고 카메라 뒤에 숨는 이가 절대 아니다. 그의 영화는 절대 매정하지 않다. 그의 시선은 더욱 정밀하고 멈출 수 없는 것이 된다. 그의 관심을 끄는 유일한 일은, 물질의 가장 취약한 지점이자 그것이 자신의 비밀을 드러낼 수 있는 지점을 찾는 일이기 때문이다. 작가 스스로 어떠한 직접적 개입도 용인하지 않기 때문에, 언뜻 보면 일련의 쇼트가 체념하는 것처럼 생각될 수 있으나 그렇지 않다. 우리가 일련의 쇼트에서 보는 것은 고발이다. 그 고발은 자신이 정형화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파토스를 창출한다. 따라서, 매우 미적이고 시적인 이 영화들은 시적 이미지들의 형식미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것은 현실에 빛이 드리울 때만 이목을 끈다. 모든 예술이 그러하듯, 네슬러의 영화들 또한 세계를 향해, 세계가 변하기를 요구한다. 그의 영화로는 〈수문에서〉(1962), 〈에세이〉(1963), 〈뮐하임(루르)〉(1964), 〈라인강〉(1966), 〈외덴발트슈테텐〉(1966), 〈셰필드 노동자 클럽〉(1965), 〈그리스로부터〉(1966)가 있다.
J-M.S.
이 글은 본래 이탈리아어로 ‘타협하지 않는 다큐멘터리스트’(Un documentarista non riconciliato)라는 제목 하에 ‘불안한 이들: 위기의식을 지닌 유럽 영화와 반란의 무력감’(Gli Irrequieti: il cinema europeo tra coscienza della crisi e impotenza della rivolta) 제1호(1966-67년, 밀라노: Quaderni del C.U.C.Mi.)의 80페이지에 처음 기재되었다.
페터 네슬러가 전후 독일에서 가장 중요한 영화감독이라고 점점 더 확신하게 된다. 이곳에서 직접 촬영할 수 있었던 연로한 감독들, 가령 프리츠 랑이나 로셀리니(Fear, 1954)와 함께 그러하다. 네슬러는 아마도 이곳에서 유일하게 자기가 촬영할 것을 촬영했고 사람들을 자극하려 애쓰지 않은 이였기에 더욱 중요하다. 이것은 그의 불운이기도 했다. 내가 한 번 힌츠에게 콘스탄틴 기획전 카탈로그(젊은 독일 영화)에서 네슬러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자, 그는 “우리는 영화를 매력적으로 만드는 사람들만 원합니다”라고 답했었다. 그저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을 기록하거나, 촬영하고, 색칠하고, 그려내는 이들, 임의의 형식을 사전에 부과하지 않고 실재성을 지켜내는 이들, 이들이 영화계 안에서 점점 더 희귀해진다. 그저 사과를 그렸을 뿐이지만 사람들에게 “당신이 그리는 것은 사과가 아닙니다”라고 들었던, 세잔과 같은 사람들 말이다. 이러한 일이 벌어지는 까닭은, 영화가 점점 더 스스로가 절대 되어서는 안 되는 것, 우발적으로도 용인되어서는 안 되는 것, 바로 상품이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영화를 팔 수 있다는 개념과는 다른 문제인데, 영화가 급속도로 상품화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영화가 종속된 구조를 폭파할 필요가 제시된다.
네슬러는 가장 시적인 영화를 만들어왔다. 시작은 〈수문에서〉(1962)였고, 이는 〈마쇼르카-머프〉(1963)보다 먼저였으며, 내가 젊은 독일 영화의 가장 중요한 단계 중 하나라 여기는 토메의 아름다운 〈화해〉(1965)보다도 먼저였다. 〈수문에서〉가 만하임 심사위원회의 검토를 받을 때, 그들은 “수문이 말을 하다니, 그럴 수는 없다”고 평했다. 그리고 〈에세이〉(1963)가 완성되었을 때 그들은, “아이들이 그렇게 말할 리가 없다. 그럴 수는 없다”고 말했다. 이후 〈뮐하임(루르)〉(1964)의 경우는 페르버가 필름크리티크에 적은 것을 제외하면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내게 〈뮐하임〉은 가장 ‘미조구치적’인 영화다. 당시 네슬러가 미조구치를 전혀 보지 않은 상태였지만 말이다. 내가 뜻한 미조구치적인 것의 예로 〈산쇼다유〉(1954)가 있다. 〈산쇼다유〉는 가장 강렬한 영화 중 하나이자, 유일한 마르크스적인 영화로, 당시 사람들이 적었던 것처럼 신의 자비에 관한 영화가 아니다. 물론 그것이기도 하지만. 〈뮐하임〉은 아이들이 자라나기도 전에 사회로부터 처벌받는 모습을 보여줬다는 이유로 거부당했다. 그 후 네슬러는 두 편의 장편 영화를 제작했다. 〈외덴발트슈테텐〉(1966), 〈셰필드 노동자 클럽〉(1965), 이들은 텔레비전 방영되지 않았다. 그다음에 만들어진 것이 〈그리스로부터〉(1966)로, 매우 중요한 영화이자, 미학적으로 테러적이며, 나에게 더 중요한 영화다. 당시의 사람들은 네슬러가 정치적 강박에 사로잡혀 있다고 말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가 그런 정치적 강박이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리스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증명되었다. 군중의 구호를 동시녹음하지 않은 것은 분명 영특한 판단이었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의미심장할 것인데, 내가 일종의 동시녹음 수호자이기 때문이다. 직관적인 천재성은 그 구호들이 오로지 그의 내레이션으로만 말해지는 것에 있다. 그는 사람들이 말하고 소리 지르는 내용을 따라서 반복했다. 현재 네슬러는 스웨덴 방송을 위한 장편 영화를 만들고 있다. 제목은 〈루르 지역에서〉(1967-68)이다. 브레히트의 말이 이 영화에도 적용될 수 있다. “자명한 것의 잔해 밑에서 진실을 파헤쳐내고, 개별적인 것을 일반적인 것과 두드러지게 연결시키며, 큰 과정 속에서 특수한 것을 고수하는 것, 이것이 리얼리스트들의 예술이다.”
네슬러는 내 친구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이미 세 편을 영화를 만든 상태였고, 그것들은 전후 독일에서 만들어진 유일한 독일 영화였다. 그리고 오늘날, 그의 최신작 이후로도, 그는 여전히 유일한 독일 영화 감독으로 남아있다. 우리가 동시대 독일 영화 전체를 네슬러의 영화와 견주어 본다면, 분명 브레히트가 1920년대 독일 연극에 대해 적었던 말을 반복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들은 이것이 뭔가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르나, 내 말을 들어보시오. 이건 순전한 추문입니다. 당신들 눈앞에 펼쳐진 것은 당신들의 완전한 파산을 증명하며, 여기서 공개적으로 폭로되는 것은 바로 당신들 자신의 어리석음과 정신적 나태함, 그리고 타락입니다."
J-M.S.
1968년 10월 필름크리티크 142호(688-694쪽)에서 헬무트 페르버가 진행한 인터뷰 "다니엘 위예와 장-마리 스트로브와의 대화(Gespräch mit Danièle Huillet und Jean-Marie Straub)"의 미제목 코다로 독일어판이 처음 기재되었다.
이후 1972년 9월 필름크리티카 227호(290-291쪽)에서 "네슬러 소개(Introduzione a Nestler)"라는 제목과 마지막 단락이 추가되었고, 다니엘 위예가 이를 이탈리아어로 번역하여 출판되었다.
* [역주] 네슬러가 <그리스에서>를 제작한 65-66년으로부터 약 1년 후, 중도 및 좌파 세력이 총선에서 승리할 것이 자명해지자 요르요스 파파도풀로스 대령을 필두로 한 극우 군부가 쿠테타를 일으켜 총선을 무기한 연기하고 군부독재를 시작했다. <그리스에서>는 파시즘 정권 출현에 대한 예언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해당 영화는 공개 당시만 하더라도 반공주의가 지배적이던 서독 사회에서는 용인된 수 없는, 지나치게 공산주의적인 작품으로 받아들여 졌다. 이러한 까닭으로, 네슬러는 다음 작품을 독일에서 만들 수 없게 되었다. 1968년, 그는 어머니의 고향인 스웨덴으로 이주하여 SVT(스웨덴 공영방송국)영화를 제작하거나, 부인인 쇼카 네슬러(Zsóka Nestler)와 함께 자체적인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4 다니엘 위예가 페터 네슬러에게 보낸 편지
1969년 3월 8일
(팔라스트호텔 만하이머 호프에서 보냄)
친애하는 페터,
편지와 프린트, 다시 한 번 정말 고마워요. 아직 영화는 보지 못했어요. 이유가 있어요.
a) 바흐 영화의 영어판 사운드 편집 – 런던에서 2주간의 사투를 벌어야 했고, 마침내 우리가 원하던 버전에는 도달했어요. 이제 문제는 그들이 이 버전을 그대로 상영할 것인지, 여전히 자막 버전을 선호할 것인지에 달려있죠!!!! 게다가 시간도 없고 35mm 플랫베드 편집기도 없어요! b) 린더도 그 영화를 보고 싶어 하는데, 며칠 뒤에 돌아온다고 하네요. 우리가 3월 26일에 로마로 떠나야 할지도 몰라서, 어떻게든 보여줘 볼게요.
헝가리어판 오디오도 고마워요… 헝가리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영화를 보길 바랄 뿐이에요. 세메시의 글은 들라예에게 전달할게요. 그런데 일주일 전에 헝가리에서 온 들라예의 엽서를 받았나요??? 그가 얀초의 최신 영화에서 작은 역할을 맡았다고 하더라구요???
졸탄에게 행운을, 사진도 고마워요, 쇼카와 유디트에게도 깊은 우정을 전해줘요 …
<연대기>는 <신랑>과 함께 다음 주에 테아티너에서 개봉해요. 어제와 오늘, 아펜틴 스튜디오의 사운드 엔지니어와 8시간씩 작업했어요. 사람들이 제대로 된 사운드를 들을 수 있도록 영화관에서 일하고 있어요(= 사운드 재작업)... 실감 안나는 일이죠.
그것에서만 벗어나면, 이곳은 다시 조용해졌어요. 그런데 영화에 관해서는… 어쩌면 모든 게 다 헛된 일인지도 모르겠어요... 적어도 지금 우리 눈에는 그렇게 보여요. 콘스탄틴 사람들이 하는 짓은 “나치 시절 UFA가 하던 것만큼 나쁘거나, 어쩌면 더 나쁘다. 사람들을 바보로 만들고, 독으로 오염시키는 일이다.”라고 J.-M.은 계속해서 말하고 있어요. 하지만 콘스탄틴이 스스로 몰락할 때까지는 이 싸움도 절망적이죠. 그리고 그 이후에 상황이 나아질 거라고 보장할 수도 없어요. 오히려 (?) 더 나빠질 수도 있구요. 모든 것이 악화되고 있어요...
이탈리아에서 혁명이 가능할까요? (그것만이 이 어리석음과 아둔함을 한 번에 뒤흔들 유일한 방법일까요?) 아니면 그곳의 절망도, 다르긴 하겠지만, 마찬가지로 너무도 큰 걸까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우리가 맡은 일을 최선을 다해 하는 것뿐이죠. 하지만 그것조차도, 영화가 망가지는 것을 막기 위해 싸워야 한다는 것은 너무 바보 같은 일이에요. 세상에는 우리가 싸워야 할 훨씬 더 중요한 것들(더 중요한 사람들?)이 많은데 말이죠. 그런데도 영화 때문에 싸워야 하죠. “pour ne pas céder [굴복하지 않기 위해]”. 고다르는 홀로는 오래 버틸 수 없다고 하지만, 어쩌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티는 것뿐일지도 모르죠…
당신도 알겠지만, 우리가 아주 슬프다는 건 아니에요. 다만 피곤하고, 바흐 영화가 너무 늦게 개봉한 것(그의 나라에서조차 14개월이나 지나서!)에 조금 화가 나 있어요. 그리고 우리를 15년 동안 방치하고 내팽개쳤던 같은 자들이 이제 와서 – 다른 사람이 전해주거나 글을 써주길 종용하는 방식으로 – “스트로브의 영화를 제작하고 싶다”고 말하는 걸 보니 화가 나는 것이죠! 위선자들! 그래서 우리가 떠나는 것입니다.
토메는 장편 영화 <탐정>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우리는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렘케는 프랑크푸르트 방화범들에 관한 TV 영화를 찍고 있어요. (“그들은 세상이 너무 좁아졌다고 느낀 사람들이었다” …? 라고 렘케가 말하더군요.) 칠만은 마치 살아 있는 시체 같아 보여요. 그리고 언더그라운드 영화가 엄청 많아요. 베를린 영화학교에서 쫓겨난 학생들, 예를 들면 스트라셰크 같은 이들은 학생들과 함께, 학생들을 위해, 학생들에 의해 영화를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카우핑거 거리에는 (지하철 공사로 대규모 재개발 중인데) 나무 판에 커다란 글자로 이렇게 적혀 있더라구요: “STREIK”[파업].
로마에서 J.-M.은 오통을 촬영할 거예요 – 피에르 코르네유의 희비극(17세기 작품)을 기반으로 한 영화죠. 오통은 네로의 후계자인 갈바의 뒤를 잇는 인물이에요. 그리고 두 명의 소녀, 플로틴과 카미유에 대한 이야기죠(“눈은 언제나 감겨져 있길 원하지 않는다”). 16mm, 컬러, 동시 녹음. 10명의 촬영팀. 팔라티노 언덕에서, 다섯 막 전체를 야외에서 촬영할 예정이에요. 9월-10월?? (허가 문제와 관광객들 때문에!) ???
이정도면 소식이 꽤 많은 편이죠?
진심 어린 안부 인사를 전할게요, 그리고 온 가족에게도.
곧 만나길 바라며???
D
5 다니엘 위예 & 장마리 스트로브가 페터 네슬러에게 보낸 편지
1984년 9월 10일
(JMS – 자필로 작성)
친애하는 페터,
마요르카에서 보낸 편지 고마워. (아니, 우리는 조르주 상드의 그 글은 몰랐어.) 그렇게 보이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난 글쓰는 걸 좋아하지 않아!), 나는 종종 너와 너희 부부를 생각해. 애정 어린 마음으로, 그리고 네 작업에 대한 경이로움과 함께.
우리는 아직 건강해 – 지금까지는 – 어느 정도는. 하지만 내 이빨과 허리는 엉망이야! 그리고 지치고 늙은 뼈들과 눈도! 다니엘이 말하길, 내가 토스카니 시가를 너무 많이 피워서 결국 제3제국처럼: 붕괴될 거라고 해! 그럼 어쩌지? 우리는 건강보험도 없고, 연금도 없어... 게다가 노동허가도 없고, 체류 허가도 없어.
하지만 우리는 카프카 영화에서 살아남았다는 것에 자랑스러워 – 건강 면에서도: 몇 달간의 준비, 31명의 배우, 12주간의 촬영(74,800m의 네거티브, 이 중 절반 이상이 필름랩에서 파기됨), 절반이 야간 촬영이었고 (하루 평균 서너 시간밖에 못 잤어), 12주간 하루도 쉬지 않고 (오후 2시부터 새벽 2시까지) 매일 편집, 그리고 함부르크와 파리의 필름랩들과의 전투.......
우리는 U-matic이 없어.
(다니엘 – 타자로 작성)
그런데 혹시 당신이 스웨덴 TV를 통해 “공식적으로”, 헤센 방송에서 방영한 방송의 사본을 구해줄 수 있을까요? 우리가 6개월 전에 그들에게 준 양질의 35mm 프린트의 사본이죠! 만약 가능하면, 디에트마르 싱스에게 전달해줘요. (그가 담당 “편집자”입니다. 그리고 친구이기도 해요.) 그의 개인 주소는: Wolfgangstrasse 104, Fr./M.
또 다른 방법(????): 스웨덴 시네마테크에서 상영하는 건 어때요? 에노 파탈라스가 뮌헨 영화박물관에 프린트를 갖고 있어요. 아니면 함부르크 필름하우스 사람들도 있어요. (그래도 스톡홀름이랑 더 가까우니까요!) 그들에게도 우리가 (베를린 상영 버전의) 좋은 프린트를 줬어요.
담당자: 디터 코슬릭, 필름하우스
주소: Friedensallee 7, HH
전화: 391747
스웨덴 시네마테크가 우리 죽기 전에 우리 영화 한 편 튼다고 해서 망하지는 않겠죠? (아니, 혹시 그렇게 되려나?) 흑백. 화면비 1:33. 상영 시간: 2시간 7분.
이 영화와 그 제작 과정에 관한 책이 피셔 출판사에서 막 출간됐어요. 아직 보지는 못 했어요. 사진도 포함돼 있다고 해요. 제목은 ≪계급관계≫…
당신 부부에게 포옹과 입맞춤을 보내요. 다시 파리나 로마에는 안 오는 건가요?
우리 고양이 미스티가 우리가 돌아온 지 일주일 만에 세상을 떠났어요. 13년 반을 살았고, 1년간 암과 싸웠어요.
강이지는 잘 지내요. 아직도 미스티를 찾고 있더라구요.
D*